Q . 만약 위 지도와 같은 모양의 땅덩이가 있다면, 그리고 이 땅덩이가 2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면
그곳의 경계선은 어디로 설정하는게 좋을까?
A . 가운데 진한 갈색이 동서로 길쭉하게 나타나는 지대, 즉 해발고도가 높은 산맥이 연속되는 지대를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으로 나누면 될 것임.
지리적 감각이 있는 사람은 눈치채었겠지만
이 지도는 유라시아 대륙을 뒤집어 놓아서, 기존의 위치 및 지역에 대한 이미지를 재고하도록 하는 지도임
위 지도에서 두 지역의 경계는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맥 지대일 것만 같지만,
사실 유라시아 대륙의 경계는 우리가 알다시피 '우랄산맥'으로 정해져 있음
위 지도에서 우랄산맥은 아는 사람만 아는 정도의 크기로 되어있어서, 두 지역의 '논란없는' 경계라고 하기에 미미함
자연지리적으로는 하나의 광활한 땅덩이로만 여겨짐에도
문화적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히 두개의 분리된 대륙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유럽과 아시아...
자연지리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광활한 땅덩이 어디엔가 유럽인들은
아시아와의 구분을 짓기 위한 경계선을 명확히 설정해야 했음
이것이 해양에서의 지리상의 발견과 또 다른 맥락에서, 러시아의 지리상의 발견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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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앙 그라탈루(이대희 외 역), 2010, <대륙의 발명>
우리가 진리라고, 당연하게 알고 있는 대륙 구분, 대륙 간의 경계가
사실은 역사적으로 특정 맥락에 의해 우연히 탄생하고, 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책
정말 좋은 책이지만, 절판되어서 중고책으로만 구매할 수 있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구세계 내부에서 경계의 선을 긋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세 시대 교회의 신부들이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음이 분명하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경계로는 시나이 반도 양쪽 끝에 있는 지협들 가운데 하나를 취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거리상 더 좁은 수에즈 지협이 경계로 채택되었다. (...) 진정한 난제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였다. (...) 동쪽으로는 유럽이 어디에서 멈추는가? 늘 문제였던 이 질문에 대해 18세기에는 확실한 답이 없었다. (...)
드골 대통령이 “유럽은 대서양에서부터 우랄산맥까지”라고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지정학적 상황이 당시의 지적 맥락과 결합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 이래 러시아 제국이 추구한 강대국 정책과 디드로(D.Diderot)를 비롯한 백과전서파, 그리고 ‘계몽 군주들’과의 관계가 그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재위 기간(1682-1725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 표트르 대제는 1721년에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면서 한 세기 동안 ‘국제 관계’에 진입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러시아 제국은 유럽의 강대국임을 각인시켰고, 이것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재확인되었다. (...) 이와 같은 배경으로 러시아에서는 서유럽의 지식 역동성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구대륙의 동쪽 경계를 정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타티치에프(V.Tatischev)는 러시아 영토를 가능한 한 많이 유럽에 포함시키기 위해 유럽 경계를 최대한 동쪽으로 밀어내자고 제안했다. 타티치에프는 어느 스웨덴 장교가 주장했던 생각을 받아들여서, 당시 광업과 공업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우랄산맥을 경계로 제안했다.
만일 1762~1796년 재위했던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II)가 디드로와 강력한 유대 관계를 맺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생각은 당시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백과전서파 디드로는 방대한 편집 기획을 압박하는 심각한 재정 위기 때문에 소장하던 장서들을 팔려고 내놓았는데, ‘계몽여군주’ 예카테리나 2세가 그를 구제하기 위해 장서들을 사들였다. 그리고 여제는 디드로가 죽을 때까지 그 장서들을 이용하게 해주었다. 디드로는 여제에 보답하기 위해 5개월간 러시아 궁중에서 지내면서 정부와 대학을 위한 개혁안을 세웠다.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체류했던 경험은 바로 우랄산맥을 경계 기준으로 제시한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백과전서> 역시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로 이 설정을 채택했다. 그런데 <백과전서>에는 막강하고 지속적인 권위가 있었다. 특히 교과서, 지리부도, 벽걸이 지도 등 교육 도구로 활용되는 정보의 주요한 원천이었고, 이러한 교육 도구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계몽사상을 전파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모든 학생들이 19세기 초부터 유럽은 ‘대서양에서 우랄산맥까지’라고 배우게 된 것이다.
크리스티앙 그라탈루(이대희 외 역), 2010, <대륙의 발명>, p.96~99.
정리하면
1. 지정학적 상황: 18세기 이래로 러시아의 근대화, 강대국화, 유럽으로의 편입 욕망(표트르 대제 하드캐리)
그 과정에서 타티치에프의 '우랄산맥 경계설' 주장
2. 지적 맥락: 백과전서파 디드로가 예카테리나 2세의 후원을 받음
디드로는 러시아의 '성은'을 받아 백과전서에 '우랄산맥 경계설'을 '지리적 사실'로 편찬함
바실리 타티치에프(Vasily Tatishchev), 러시아의 지리학자, 역사학자, 민족지학자
페름, 예카테린부르크 도시 건설을 주도했고, 특히 우랄산맥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제안함
이로 인해 러시아의 중심 지역을 모두 유럽으로 편입시킴으로서, 진정한 러시아의 '유럽화'를 만들어낸 인물임
https://goo.gl/maps/DPGMxpxo3JabpEi8A
예카테린부르크 교외의 우랄산맥 자락에 위치하는 '유럽-아시아 경계 기념비'
인근에서 유명한 관광지라고 함
https://goo.gl/maps/CTneg6fTrtxXUqY86
유럽-아시아 경계 기념비 바로 옆에는 타티치에프 기념비도 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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